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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적
- 02 Dec, 2025
분기 말 3일 전, 견적 10장이 동시에 들어온 날
분기 말 3일 전, 견적 10장이 동시에 들어온 날 오후 4시 47분. 메일 알림이 울렸다. 공공 섹터 담당 과장 채팅방에 "RFP 급건 들어왔습니다"라는 메시지. 그 다음 2분 뒤에 금융사 IT팀에서 전화. "견적 다시 부탁드립니다. 예산 조정되었어서요." 5분 뒤, 또 다른 고객사. "내일까지 초안 줄 수 있을까요?" 분기 말 3일 전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매년 반복되는 패턴이긴 한데, 진짜 동시에 터지는 날도 있다. 고객사들도 자기네 회계 연도 맞추려고 이 시점에 RFP 던지는 거고, 우리도 실적 인정받으려고 이 시점에 수주해야 하는 거다. 그 사이에서 영업사원은 밤샘을 한다.오후 5시, 재난 관리 시작 일단 들어온 건 뭔지 정리했다. 공공기관 A (시청): Dell 서버 2U 4대 + NetApp 스토리지 (마진 형편없음) 금융사 B (은행): HPE 서버 + Lenovo 계산 디바이스 (새로운 고객) 대형 마트 C: Cisco 네트워크 스위치 (이미 3번 견적 냈는데 또 내야 함) 제약회사 D: 전체 하드웨어 리프레시 (제일 큰 액수)오후 5시 30분, 과장실로 들어갔다. 실장과 이사 앞에서 우선순위 회의. 30초 만에 결정났다. 실적이 필요한 순서대로: 1순위: 제약회사 D (예상 수주액 3억 2천만 원) - 제약사들은 정책 바뀔 수 있으니 지금 당장. 2순위: 은행 B (예상 1억 8천만 원) - 신규 고객, 향후 반복 구매 가능성. 3순위: 시청 A (예상 9천만 원) - 공공이라 마진 안 나오긴 하는데 실적은 실적. 4순위: 마트 C (예상 4천만 원) - 낮은 마진, 이미 경쟁사가 치고 들어온 상태. 종이에 써가지고 팀원들 각각 배정했다. 내가 맡은 건? D, B, 그리고 C. "하드 너 C는 왜 줬어? 이미 지쳤잖아." 실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맞다. 난 이미 이 고객사에 3번 견적을 냈다. 매번 "좀 더 깎아달라"고 했다. 매번 거절당했다. 왜 또 내는가? "C 담당 IT팀장이 너한테 편해. 이번엔 되는 게 아니면 포기 선언하고 다른 솔루션 제안해." 아, 그렇구나. 내 인맥과 신뢰가 더 낫다는 거다. 오후 6시. 팀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남았다. 오후 6시부터 오전 1시까지, 견적서 라인 첫 번째로 건드린 건 D (제약회사). 전화해서 IT과장이랑 30분 통화. 현재 서버 수명이 다 됐고, 5년 유지보수 계약을 원한다고. 내가 물었다. "예산은?" "정해진 게 없는데 현실적인 선에서요." 그게 뭐 하는 말인가? 5억인 건가, 2억인 건가. 다시 물었다. 세 가지 시나리오로 만들어달라고. 저가형: HPE ProLiant DL380 Gen11 4대 + NetApp A250 (1억 5천만 원) 중가형: DL380 Gen11 6대 + NetApp A400 (2억 3천만 원) 고가형: DL380 Gen11 8대 + NetApp A800 (3억 2천만 원)어느 걸 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준비해놓는 거다. 이게 영업 기술이다. 엑셀 펼쳤다. 단가표 끌어 내려서 수량 곱하고, 벤더 마진 5% 먹고, 우리 마진 8%를 남겨놓고, 한 30분에 D 견적 3개 시트 완성. 오후 7시 20분. B 은행으로 넘어갔다. B는 새로운 고객사라 복잡했다. RFP에 명확하게 쓰여있지 않은 부분이 5군데. 기술 담당자들한테 구글밋으로 3명이 동시에 물어봐야 했다. SE한테도 "HPE랑 Lenovo 계산 디바이스 호환성 이슈 없겠죠?"라고 카톡했다. SE가 10분 뒤 답해줬다: "특별히 없습니다. 다만 펌웨어 버전 확인하고." 그거 하나로 30분을 더 소비했다. 검색, 리스트 확인, 스펙 맞추기. 오후 8시 45분. B 견적 2시트(기본형, 확장형) 완성. 오후 9시. C 마트 담당자한테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견적 드린 거 보셨어요?" "아, 하드. 그건데요, 다시 한번..." 여기서 끊었다. 내가 말을 이어받았다. "예산이 더 줄었나요?" "네, 좀." 마진을 더 깎아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물어보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다. 어제 견적에서 10% 더 깎은 버전을 만들어서 내일 아침 제출하겠다고 했다. 고객이 좋아할 리 없지만, 어쨌든 내일은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후 10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사무실 흡연실에서. 30대 영업이 하는 조용한 자살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매년 이 시즌만 되면.오후 10시 30분, 예상 못 한 변수 오후 10시 30분에 D 제약회사 IT과장이 또 전화했다. "하드, 근데 혹시 이번에 Dell 말고 Lenovo로도 가능할까?" 내 마음속에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목소리에는 안 냈다. "아, 가능합니다. 근데 납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고, 호환성도 한번 더 봐야 하는데요. 내일 아침 확인하고 대안을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고 SE에게 카톡했다. "DL380 Lenovo 대체 가능? 내일 오전까지." SE는 답이 바로 안 왔다. 당연하다. 밤 10시 40분이니까. 30분 뒤에 답이 왔다: "하드, 신경써야 할 부분 많습니다. 내일 전화로 이야기할게요." 좋다. 내일 아침 8시 전에 또 한 시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밤 11시. 사무실에는 나 말고 또 2명이 있었다. 인턴 1명, 그리고 기술팀 과장. 기술팀 과장이 말했다. "넌 언제 가?" "새벽 2시쯤." "그럼 내가 6시에 자고 8시에 와. 그 전에 물론 DB 정리하고." 이게 우리 회사 분기 말의 모습이다. 빡세다. 밤 11시 30분, 우선순위 재조정 밤 11시 30분. 문득 깨달았다. 내 우선순위 계획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D는 Lenovo 버전까지 만들어야 하고, B는 SE가 확인을 안 줬고(내일 아침에 주겠지만), C는 10% 인하 버전을 만들어야 하고, A는... 아, A는 어차피 공공이니까 밤새 안 해도 된다. 공공 입찰은 보통 월요일 오전에 공시되니까 당일 대응하면 된다. 그래서 다시 정렬했다.지금 바로: D 기본 버전 마무리 + Lenovo 대체안 준비 (내일 8시 전) 다음: B 견적 최종 확인 (내일 오전 10시 전) 마지막: C 인하 버전 (내일 오전 11시 전)밤 12시 15분. D의 Lenovo 버전을 만들고 있었다. 단가표를 다시 끌어냈다. Dell이랑 Lenovo 단가가 다르다. Lenovo가 보통 3~5% 싸다. 그러면 마진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우리 마진을 8%에서 6%로 깎고, 고객한테는 "최선을 다해 가격을 조정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진짜 우린 자존심 없이 산다. 밤 12시 50분. D 견적 수정본(Lenovo 버전) 완성. 4개 시트다.저가형 Dell 저가형 Lenovo 중가형 Dell 중가형 Lenovo 고가형 Dell 고가형 Lenovo아, 6개다. 수정했다.오전 1시, 정리 시간 오전 1시. 다 만들고 폴더에 저장했다.제약회사D_견적_20240327_v1.xlsx (Dell 3가지) 제약회사D_견적_20240327_v2.xlsx (Lenovo 3가지) 은행B_견적_20240327_초안.xlsx 마트C_견적_20240327_인하버전.xlsx내일(오늘?) 아침에 확인해서 보내면 된다. 오전 1시 15분. 퇴근했다. 지하철이 끊겨서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밤새 만든 견적이 몇 개나 수주될까? 통상 50%? 아니, 분기 말에 이렇게 동시에 터지면 70% 이상 수주된다. 고객들도 여러 업체 견적을 받고 있을 테니까, 일단 우리가 빨리 내면 우리가 이긴다. 속도가 무기다. 집에 도착한 게 오전 2시.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또 밤샘?" "응." "쉬어." 나는 소파에 누웠다. 자지 못했다. 머리가 계속 돌아갔다. 내일 오전 9시부터 D와 B를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D는 8시까지 SE가 Lenovo 호환성을 최종 확인해줘야 한다. B는 기본형이랑 확장형 중 어느 걸 권할지 미리 생각해둬야 한다. C는 10% 깎은 게 경쟁사랑 비교해서 경쟁력 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오전 3시. 휴대폰을 들었다. SE에게 카톡했다: "내일 8시 전에 Lenovo 호환성 확인 부탁. 제약사 급건이라 진짜 중요." SE는 답이 없었다. 자고 있겠지. 오전 3시 30분. 침대로 옮겼다. 아내 옆에 누웠다. 아내가 슬리핑 모드로 말했다: "실적 채워?" "모르겠어. 내일 봐야지." "수주돼." 아내의 예감은 보통 맞다. 아침 6시, 재시작 아침 6시에 깼다. 휴대폰 알림. SE가 답을 했다. "확인했습니다. Lenovo ThinkSystem SR650 시리즈면 문제없습니다. 다만 메모리 호환성은 별도 확인 필요할 수 있으니 고객에게 미리 말씀하세요." 좋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침 7시. 사무실에 도착했다. 기술팀 과장도 이미 와 있었다. "잤어?" "2시간." "나도." 우린 웃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 최종 정리.D 견적 2개 버전(Dell, Lenovo) 최종 확인 후 "본송합니다" 메일 준비. B 견적 기본형 추천 포지셍으로 한 줄 코멘트 추가. C 견적 인하버전 정가대비 10.5% 할인 표기해서 임팩트 주기.아침 8시. 전송 시작했다. D: "안녕하세요. 요청하신 Dell 및 Lenovo 버전 견적을 첨부합니다. 저가형(Dell 기준 1억 5천만 원)부터 고가형(3억 2천만 원)까지 3가지 안을 준비했습니다. Lenovo 버전도 동일하게 3가지 제시합니다. 궁금하신 사항 있으시면..." B: "안녕하세요. 귀사의 요건에 맞춰 2가지 안을 준비했습니다. 기본형(1억 2천만 원)을 먼저 추천드립니다만, 향후 확장성을 고려하면 확장형(1억 8천만 원)도 좋은 선택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화상 회의로..." C: "지난번 피드백 반영해서 가격을 조정했습니다. 10.5% 할인한 가격으로 경쟁력 있는 구성을 제시드립니다. 이 정도가 최선입니다. 언제 검토 가능하신가요?" 아침 9시 30분. 메일 3개 전송 완료. D에서 30분 뒤 답장이 왔다. "좋습니다. 내일 회의해봅시다." B에서는 카톡이 왔다. "고마워요. 기본형으로 먼저 검토해볼게요." C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 다른 벤더들이랑도 보고 있을 거다. [IMAGE_4] 분기 말 실적의 현실 분기 말이 되면 이런 일이 반복된다. 모든 고객사가 동시에 RFP를 던진다. 모든 영업이 밤을 샌다. 모든 기술팀이 복잡해진다. 모든 벤더(Dell, HPE, NetApp, Cisco)에서 재고 상황을 물어본다. 그 와중에 우리가 이기는 건 빠르기와 신뢰다. D 제약사는 내가 지난 1년간 6번을 찾아갔다. 매번 기술 질문에 답했고, 매번 비용을 상담했다. 그래서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 거다. B 은행은 신규고객이지만, 내가 첫 대면에서 전문성을 보였나 보다. C 마트? 그건 이미 지쳤다. 하지만 가격을 더 깎을 수 있다면 혹시 모르니 계속 간다. 분기 말 실적 10장이 동시에 들어왔을 때, 우린 이렇게 대응한다. 우선순위를 정한다. 밤을 샌다. 견적을 낸다. 기다린다. 수주되거나 떨어진다. 다음 분기를 본다. 이게 하드웨어 영업의 세계다. 오전 10시. 회의실에서 실장과 회의. "D, B 둘 다 일단 클로징 단계로 간 거 맞나?" "B는 기본형으로 검토한다고 했고, D는 내일 회의한대요." "C는?" "글쎄요. 경쟁사 가격을 기다리는 것 같아요." 실장이 웃었다. "그럼 D만 해도 3억이 넘는데, 이미 분기 실적의 30%는 확보했네. 좋은데?" 맞다. D가 3억 2천만 원에 들어가면, 나머지 쿼터(약 7억)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다. B가 1억 8천만 원 들어가면 더 쉽다. 물론 아직 불확실하다. 내일 D 회의에서 예산 조정이라도 나오면? B가 마지막 순간에 경쟁사로 돌아서면? 알 수 없다. 영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결산 분기 말 3일 전, 견적 10장이 동시에 들어온 날. 나는 밤을 새웠고, 4장을 만들었고, 3장을 보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밤을 새웠고, 예상 수주액 5억 2천만 원을 만들었다. 모든 게 수주될 리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일 또 다른 RFP가 들어올 거고, 모레도, 분기 말까지 계속 들어올 거다. 그때마다 우린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빠르게, 정확하게, 그리고 자존심 없이. 오후 1시. 한 끼 먹으러 나간다. 벤더 PM과 맞기로 했다. 면접 장비 계약 건으로. 점심도 일이다.밤을 샌 지 24시간.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