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없이 혼자 기술 스펙을 설명했다가 망한 미팅

SE 없이 혼자 기술 스펙을 설명했다가 망한 미팅

오늘 미팅이 있다

오전 10시. 고객사 CTO 미팅. 상대는 금융권 대형사. 프로젝트 규모 15억. NetApp 스토리지 제안이다.

원래는 SE 태우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SE한테 연락 왔다. “과장님, 죄송한데 내일 다른 미팅이…” 다른 건? 20억짜리 공공 프로젝트.

당연히 그쪽이 우선이다. “알았어. 내가 혼자 갈게.”

15억 정도면 혼자 가도 되겠지. 고객사 담당 과장이랑은 친하다. CTO 미팅도 ‘얼굴 보는’ 자리라고 했다.

PPT는 벤더에서 받은 거 있다. 어제 밤에 한 번 훑어봤다. ONTAP, SAN, NAS, 이중화, 성능… 뭐 대충 안다.

8년 차다. 이 정도는 간다.

미팅 시작

고객사 도착. 11층 회의실. 담당 과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과장님, 오셨어요. CTO님 곧 오십니다.”

5분 후 CTO 등장. 50대 중반. 카리스마 있다. “안녕하세요. 하드영업입니다.”

악수. 명함 교환. 자리 착석. “오늘 NetApp 제안 들으러 왔습니다.”

PPT 켠다. 시작한다. 회사 소개, 레퍼런스, 제품 라인업. 여기까진 괜찮다. 외운 거다.

문제는 기술 파트부터다.

“NetApp은 ONTAP 기반으로…” CTO가 끼어든다. “ONTAP 버전은요?”

“9.14입니다.” “클러스터 모드죠?”

“네, 클러스터 모드입니다.” 이건 안다. SE한테 여러 번 들었다.

“SVM은 몇 개까지 구성 가능한가요?”

SVM? 뭐였지. Storage… Virtual… Machine? “그건… 용량에 따라 다릅니다.”

애매하게 답했다. CTO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무너지는 순간

“그럼 AFF랑 FAS 차이는 뭡니까?”

AFF는 All Flash. FAS는… 뭐였지. “FAS는 하이브리드입니다.”

“하이브리드요? 구체적으로?” “SSD랑 HDD 섞어서…”

틀린 건 아니다. 맞다. 근데 CTO 얼굴이 안 좋다.

“SnapMirror 동작 방식은?”

아. 이건 들어봤다. 복제… 백업… 그런 거. “데이터를 다른 스토리지로 복제하는 겁니다.”

“동기식입니까, 비동기식입니까?”

둘 다 되는 거 아닌가? “둘 다 지원됩니다.”

“그럼 RPO는요?”

RPO? Recovery Point…? “그건… 고객사 요구사항에 맞춰서…”

CTO가 펜을 내려놓는다. “SE분은 안 오셨나요?”

칼이다. 정확히 급소를 찌른다. “오늘 다른 미팅이 있어서…”

“그러시구나.”

끝이다. 분위기가 끝났다. 나머지 슬라이드는 의미 없다.

30분 미팅이 20분 만에 끝났다. “자료 검토해보겠습니다.” 사실상 거절이다.

복기

회사 돌아와서 앉았다. 담당 과장한테 카톡 왔다.

“과장님, CTO님이 기술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SE분이랑 다시 오시면 검토하겠답니다.”

알았다는 답장. 폰 내려놓는다.

8년 차다. 15억짜리 놓쳤다. SE 없이 혼자 간 내가 병신이다.

뭐가 문제였나. ONTAP 버전? 그건 맞췄다. SVM? 대충 얼버무렸다. AFF/FAS? 설명이 부족했다. SnapMirror? 개념만 알았다. RPO? 몰랐다.

“대충 안다”가 문제였다.

PPT만 보고 갔다. 매뉴얼은 안 읽었다. 벤더 교육? 귀찮아서 안 갔다. SE한테 물어볼 땐 귀동냥만 했다.

8년 동안 견적만 뽑았다. 고객 관계만 관리했다. 기술은? SE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오늘 터졌다.

인센티브 1500만원 날아갔다. 그것보다 자존심이 더 아프다.

CTO 눈빛이 기억난다.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네.’

맞다. 몰랐다.

변화

그날 저녁부터 시작했다.

NetApp 매뉴얼 다운로드. ONTAP 9.14 Administration Guide. 730페이지. PDF다.

일단 목차부터 읽는다. Chapter 1: Architecture Overview. SVM: Storage Virtual Machine. 테넌트별로 격리된 스토리지 환경. 클러스터 하나에 SVM 여러 개. 각 SVM마다 볼륨, LIF, 프로토콜.

아. 이거였구나.

AFF: All Flash FAS. FAS: Fabric-Attached Storage. 하이브리드 맞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다. AFF는 NVMe 지원, QoS 강화, 성능 최적화. FAS는 용량 중심, 비용 효율.

SnapMirror? Volume 단위 복제. 비동기: 스케줄 기반, RPO 분/시간 단위. 동기: 실시간, RPO 제로.

RPO: Recovery Point Objective. 데이터 손실 허용 범위. RTO: Recovery Time Objective. 복구 시간 목표.

이런 거 하나하나 노트에 적는다.

다음 날 SE한테 전화한다. “저번에 설명했던 AFF 구성…” “과장님, 갑자기 왜요?” “공부 좀 하려고.”

SE가 놀란다. 당연하다. 8년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다.

“SnapMirror 동기식이랑 비동기식 차이 좀 설명해줘.” SE가 15분 동안 설명한다. 다 받아 적는다.

“Aggregate랑 Volume 관계는?” “LIF는 왜 필요한 거야?” “NFS랑 iSCSI 성능 차이는?”

하나씩 물어본다. SE가 답한다. 적는다.

벤더 교육 신청한다. 다음 주 화요일. NetApp 기초 과정. 3일 코스. 회사 교육실.

평소엔 안 갔다. 귀찮아서. 이번엔 간다.

두 달 후

다시 그 고객사. 이번엔 SE랑 같이. CTO 미팅. 재도전이다.

담당 과장이 자리 만들어줬다. “CTO님이 한 번 더 보자고 하셨어요.”

미팅 시작. SE가 기술 설명한다. 나는 옆에서 듣는다.

“SVM 구성은 이렇게…” 고개 끄덕인다. 이해한다.

“SnapMirror는 비동기로 15분 RPO…” 맞다. 알겠다.

CTO가 질문한다. “FlexClone은 어떻게 동작합니까?”

SE가 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한다. “Snapshot 기반 카피온라이트 방식입니다.” “초기엔 메타데이터만 복사하고요.” “실제 데이터 변경될 때 블록 할당됩니다.”

CTO가 나를 본다. 표정이 다르다. 조금 놀란 얼굴.

“공부 좀 하셨네요.” “네. 지난번 이후로요.”

SE도 옆에서 놀란다. 미팅 끝나고 나오면서 말한다. “과장님, 언제 그렇게 공부했어요?”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날 미팅. 잘 됐다. 다음 주 POC 일정 잡혔다. 한 달 후 계약 들어갔다.

15억. 인센티브 1500만원. 두 달 전 날린 거 다시 찾았다.

근데 돈보다 다른 게 더 좋다. CTO가 악수하면서 말했다. “영업분인데 기술도 아시네요.” “같이 일하면 편할 것 같습니다.”

그 말 한마디. 두 달 공부가 아깝지 않다.

지금

지금도 공부한다.

매주 금요일 오전. 벤더 웨비나 듣는다. NetApp, Dell, HPE, Cisco. 신제품 나오면 매뉴얼 읽는다.

고객사 미팅 전날. 제품 스펙 다시 확인한다. 모르는 거 있으면 SE한테 문는다.

SE 없이 가도 된다. 기본 설명은 내가 한다. 깊은 기술은 SE 부른다.

분담이 명확해졌다.

8년 차에 배웠다. 영업도 기술 알아야 한다.

“대충 안다”는 위험하다. 고객은 안다. 모르는 걸.

CTO 앞에서 망신당한 그날. 지금 생각하면 고맙다.

그날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다.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


SE 없이 혼자 간 미팅, 두 번 다시 그렇게는 안 간다. 아니, 이젠 혼자 가도 된다.